Lee Young Hark | KUKJE GALLERY
Jun 2, 1992 - Jun 13, 1992
K1
Seoul
INTRODUCTION
Lee, Young-hark, born in Busan in 1948, graduated from Department of Sculpture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and studied at Accademia Belle Arti di Roma Scuola della Arti Ornamentali in Italy for six years. He won prizes six times at the National Exhibition (the Korea National Arts Exhibition) and the Special Prize at Dong-A Fine Arts Festival and Jung-Ang Grand Prix Exhibition. He has held total twelve times solo exhibitions at Ye Art Gallery, Pyo Art Gallery, Park Yeongd-eok Art Gallery and such domestic galleries as well as the Exhibition of Roma Galleria Porto di Ripetta. And he also sent his works to the International Mini Sculpture Exhibition of Spain(1984), Chicago Art Fair(1995) and the Miami International Fine Arts Exhibition(1996). As public sculptures, he made a Statue of Inmost feelings in the Headquarter of Capital Guard(1976) (the Statue of Fidelity in the Headquarters of Capital Guard), Interior relief of Seongyeong Library in Suwon(1994), the iron Buddhist image of Gangnam Mission Center(1996), the monument of Lee Jung-seop street name and such, and has currently been producing a Statue of martyr Kim Dae-geon for the newly constructing Korean Catholic Church in Vatican.
이영학의 조소(彫塑)에 관하여 이미 두 번이나 말한 적이 있다. 두 번 다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내가 체험한 맛은 허정(虛靜)이었다. 그 맛이 허정해 황홀(恍惚)하다고 했다. 허정의 황홀이라는 것을 맛으로 따지자면 맹물 맛 바로 그것이다. 버려진 것에서 목숨을 찾아내 살아 있음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 허정하고 황홀하다 했었다. 그때의 허정은 생(生)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허정'은 생사(生死)의 것이구나 싶어져 그냥 그대로 돌멩이 같은 단순한 덩어리들의 소곤거림이 묘(妙)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맛이란 몇 번이면 물리고 질린다. 그러나 천지가 빚어내는 맛은 죽을 때까지 물리지 않는다. 물맛 바람맛 같은 게 천지의 맛이요 허정한 맛이다. 조소인(彫塑人) 이영학은 바야흐로 허정의 맛에 무르녹아 목숨의 기미(氣味)를 엿보고 엿듣는 멋을 닮아 가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쓰고 버린 온갖 잡동사니를 주워다 생물로 빚어내는 이영학의 뜻에서 나온 목숨들(作品)이 '허정'하고 '황홀'한 체험을 불러와서 나는 이미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이영학의 작품을 보면 기교는 정신화(精神化)의 수레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이영학은 예도(藝道)를 현대조각으로 성취하려는 생명주의 관점에 투철하다.……그 세계는 양주를 막걸리로 걸러버리고 아트(art)의 춤사위들을 탈춤 등으로 용해하는 체험의 현장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드러남이 노자의 포일(抱一)과 여래의 불이(不二)를 생명의 현장에서 접근하게 하는 것이다."
쓰다 버린 쇠붙이 낫이 이영학을 거쳐 황새가 되고, 쓰다 버린 쇳조각 부손이 그의 손을 거쳐 호랑이가 되는 형상(形象) 앞에서 감흥에만 머물러서는 목숨을 물건 취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물건을 목숨으로 돌리면 이미 그것은 물건이 아니다. 목숨이 던지는 반가움은 웃음 너머에 숨어 있는 '허정'의 '기미'이다.
이영학의 조소(彫塑)에 관하여 이미 두 번이나 말한 적이 있다. 두 번 다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내가 체험한 맛은 허정(虛靜)이었다. 그 맛이 허정해 황홀(恍惚)하다고 했다. 허정의 황홀이라는 것을 맛으로 따지자면 맹물 맛 바로 그것이다. 버려진 것에서 목숨을 찾아내 살아 있음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 허정하고 황홀하다 했었다. 그때의 허정은 생(生)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허정'은 생사(生死)의 것이구나 싶어져 그냥 그대로 돌멩이 같은 단순한 덩어리들의 소곤거림이 묘(妙)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맛이란 몇 번이면 물리고 질린다. 그러나 천지가 빚어내는 맛은 죽을 때까지 물리지 않는다. 물맛 바람맛 같은 게 천지의 맛이요 허정한 맛이다. 조소인(彫塑人) 이영학은 바야흐로 허정의 맛에 무르녹아 목숨의 기미(氣味)를 엿보고 엿듣는 멋을 닮아 가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쓰고 버린 온갖 잡동사니를 주워다 생물로 빚어내는 이영학의 뜻에서 나온 목숨들(作品)이 '허정'하고 '황홀'한 체험을 불러와서 나는 이미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이영학의 작품을 보면 기교는 정신화(精神化)의 수레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이영학은 예도(藝道)를 현대조각으로 성취하려는 생명주의 관점에 투철하다.……그 세계는 양주를 막걸리로 걸러버리고 아트(art)의 춤사위들을 탈춤 등으로 용해하는 체험의 현장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드러남이 노자의 포일(抱一)과 여래의 불이(不二)를 생명의 현장에서 접근하게 하는 것이다."
쓰다 버린 쇠붙이 낫이 이영학을 거쳐 황새가 되고, 쓰다 버린 쇳조각 부손이 그의 손을 거쳐 호랑이가 되는 형상(形象) 앞에서 감흥에만 머물러서는 목숨을 물건 취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물건을 목숨으로 돌리면 이미 그것은 물건이 아니다. 목숨이 던지는 반가움은 웃음 너머에 숨어 있는 '허정'의 '기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