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Michel Basquiat | KUKJE GALLERY
Oct 12, 2006 - Nov 12, 2006
K1
Seoul
INTRODUCTION
장-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브룩클린에서 아이티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했다. 회계사였던 아버지보다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브룩클린 미술관 및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을 두루 다니며 미술에 대한 감식안을 높였다. 어머니는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제 형성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골 형태의 인물과 신체 부위들은 작가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교과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작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체 드로잉에도 매료되어 그의 드로잉 책을 독학하기도 했다.
1978년 고등학교 졸업을 일년 남짓 앞둔 작가는 학교에 다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맨하튼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맨하튼의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래피티 성격의 슬로건을 적고 세이모(SAMO)-“Same Old Shit"을 줄인 말-라고 서명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방식을 버리고 본격적인 작가로서 탈바꿈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20세기의 주요 작가들, 특히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사이 톰블리 그리고 앤디 워홀 등의 회화 스타일과 테크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중 그래피티 형식을 보여주는 톰블리의 작품은 바스키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톰블리의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드로잉, 낙서, 쓰기, 콜라주, 또 그리는 법을 동시에 배울 수 있었다. 1982년 바스키아는 당대 팝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딜러이자 그 자신의 딜러가 된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소개로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며, 이후 이들은 함께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서로의 예술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은 1981년 미국의 뉴욕이 아닌 이태리의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열렸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2년 뉴욕의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Annina Nosei Gallery)에서의 첫 미국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개인전을 열고 주요 그룹전에 초대된다. 또 그는 1982년 초대 받은 작가 176명중 최연소 작가로 독일 카셀에서 열리는 <도큐멘타 7>에 초대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90년 현 삼성 리움 미술관, 1991년 선재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바스키아와 워홀을 함께 소개한 바 있다.
바스키아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주로 길거리 문화, 카툰 캐릭터, 만화책의 주인공들 그리고 백인 중심 사회에서의 흑인의 지위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주제들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수많은 이미지와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 표현되었다. 작가는 특히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음악가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등을 존경했는데, 이들은 그의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로 자주 나타난다. 바스키아는 이들이 고결한 영웅이자 현대 문화의 중요한 공헌자라 여겼고 그들의 생활, 업적, 그리고 시련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정보를 이미지, 기호, 그리고 단어를 사용하여 작품에 표현하였으며 왕관을 그려서 그들의 중요성과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표현했다.
1983년쯤 바스키아는 캔버스 크기를 극적으로 확대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전체 구성과 내용을 위해 캔버스를 2개에서 8개까지 이어서 사용했다. 작가는 1982년 작 에서 볼 수 있듯 나무 막대와 경첩으로 연결해 거칠게 만든 틀로 이어진 다수의 캔버스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정통에서 벗어난 재료와 테크닉을 사용했다. 그의 화면은 찢어진 종이를 겹쳐 구김이 가게 붙인 콜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작품 화면에 바스키아는 주제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단어와 기호를 가미함으로써 깊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6개의 캔버스를 연결한 <바니 힐의 아들의 인생처럼Life Like Son of Barney Hill>(1983)은 화면이 길게 이어진 작품으로, 작가는 서로 공통점은 없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 이미지와 단어들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바스키아가 태어난 지 일 년 후인 1961년에 일어난 모호한 사건을 참조한 것이다. 바니 힐은 백인 사회 사업가인 베티와 결혼한 흑인 우편 공무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뉴잉글랜드 주에서 휴가 중 외계인에게 납치됐었다고 주장했다. 힐 부부는 아들이 없었지만 바스키아는 그림에 “바니 힐의 아들?(Son of Barney Hill?)"이라고 적어 넣고, 그들의 자식이 혼혈임을 나타내기 위해 어두운 갈색과 밝은 갈색의 두 가지 색을 함께 사용하여 눈이 하나밖에 없는(마치 외계인처럼) 얼굴을 그렸다. 다른 캔버스에는 역삼각형 안에 빨간색으로 ‘S’자가 그려져 있는데, 짐작하다시피 이는 바스키아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의 주인공인 슈퍼맨을 의미한다. 또한 만화책의 맨 뒤쪽에 실린 광고에서 따온 ‘스킨헤드 가발(Skin Head Wig)’이란 문구도 적혀 있다. 맨 오른쪽 캔버스에는 거친 스케치로 니켈 동전이 ‘5센트(Five Cent)’와 ‘자유(Liberty)’란 단어와 함께 그려져 있다. 동전에 그려진 얼굴이 백인임은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바스키아는 미국의 동전에는 흑인의 얼굴이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자유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바스키아는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킬만한 참조들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포함시켰다. 사회와 인종간의 평등에 대한 바스키아의 깊은 관심과 흑인 영웅들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현대미술에 있어 찾아보기 흔치 않은 독특한 인식세계를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일, 테크닉 그리고 주제들을 섭렵했으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감을 넘어서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그의 그림에 가득 채웠다. 1988년 마약중독으로 10여 년 남짓한 짧은 작가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바스키아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일견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담은, 결코 가볍지 않은 정치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1978년 고등학교 졸업을 일년 남짓 앞둔 작가는 학교에 다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맨하튼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는 맨하튼의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래피티 성격의 슬로건을 적고 세이모(SAMO)-“Same Old Shit"을 줄인 말-라고 서명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방식을 버리고 본격적인 작가로서 탈바꿈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20세기의 주요 작가들, 특히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사이 톰블리 그리고 앤디 워홀 등의 회화 스타일과 테크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중 그래피티 형식을 보여주는 톰블리의 작품은 바스키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톰블리의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드로잉, 낙서, 쓰기, 콜라주, 또 그리는 법을 동시에 배울 수 있었다. 1982년 바스키아는 당대 팝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딜러이자 그 자신의 딜러가 된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의 소개로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며, 이후 이들은 함께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서로의 예술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은 1981년 미국의 뉴욕이 아닌 이태리의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열렸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2년 뉴욕의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Annina Nosei Gallery)에서의 첫 미국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개인전을 열고 주요 그룹전에 초대된다. 또 그는 1982년 초대 받은 작가 176명중 최연소 작가로 독일 카셀에서 열리는 <도큐멘타 7>에 초대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1990년 현 삼성 리움 미술관, 1991년 선재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바스키아와 워홀을 함께 소개한 바 있다.
바스키아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주로 길거리 문화, 카툰 캐릭터, 만화책의 주인공들 그리고 백인 중심 사회에서의 흑인의 지위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주제들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수많은 이미지와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 표현되었다. 작가는 특히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음악가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등을 존경했는데, 이들은 그의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로 자주 나타난다. 바스키아는 이들이 고결한 영웅이자 현대 문화의 중요한 공헌자라 여겼고 그들의 생활, 업적, 그리고 시련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정보를 이미지, 기호, 그리고 단어를 사용하여 작품에 표현하였으며 왕관을 그려서 그들의 중요성과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표현했다.
1983년쯤 바스키아는 캔버스 크기를 극적으로 확대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전체 구성과 내용을 위해 캔버스를 2개에서 8개까지 이어서 사용했다. 작가는 1982년 작 에서 볼 수 있듯 나무 막대와 경첩으로 연결해 거칠게 만든 틀로 이어진 다수의 캔버스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정통에서 벗어난 재료와 테크닉을 사용했다. 그의 화면은 찢어진 종이를 겹쳐 구김이 가게 붙인 콜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작품 화면에 바스키아는 주제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단어와 기호를 가미함으로써 깊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6개의 캔버스를 연결한 <바니 힐의 아들의 인생처럼Life Like Son of Barney Hill>(1983)은 화면이 길게 이어진 작품으로, 작가는 서로 공통점은 없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 이미지와 단어들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바스키아가 태어난 지 일 년 후인 1961년에 일어난 모호한 사건을 참조한 것이다. 바니 힐은 백인 사회 사업가인 베티와 결혼한 흑인 우편 공무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뉴잉글랜드 주에서 휴가 중 외계인에게 납치됐었다고 주장했다. 힐 부부는 아들이 없었지만 바스키아는 그림에 “바니 힐의 아들?(Son of Barney Hill?)"이라고 적어 넣고, 그들의 자식이 혼혈임을 나타내기 위해 어두운 갈색과 밝은 갈색의 두 가지 색을 함께 사용하여 눈이 하나밖에 없는(마치 외계인처럼) 얼굴을 그렸다. 다른 캔버스에는 역삼각형 안에 빨간색으로 ‘S’자가 그려져 있는데, 짐작하다시피 이는 바스키아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의 주인공인 슈퍼맨을 의미한다. 또한 만화책의 맨 뒤쪽에 실린 광고에서 따온 ‘스킨헤드 가발(Skin Head Wig)’이란 문구도 적혀 있다. 맨 오른쪽 캔버스에는 거친 스케치로 니켈 동전이 ‘5센트(Five Cent)’와 ‘자유(Liberty)’란 단어와 함께 그려져 있다. 동전에 그려진 얼굴이 백인임은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바스키아는 미국의 동전에는 흑인의 얼굴이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자유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바스키아는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킬만한 참조들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포함시켰다. 사회와 인종간의 평등에 대한 바스키아의 깊은 관심과 흑인 영웅들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현대미술에 있어 찾아보기 흔치 않은 독특한 인식세계를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일, 테크닉 그리고 주제들을 섭렵했으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감을 넘어서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그의 그림에 가득 채웠다. 1988년 마약중독으로 10여 년 남짓한 짧은 작가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바스키아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일견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담은, 결코 가볍지 않은 정치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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