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BEUYS
Oct 14, 2003 - Nov 30, 2003
K1 Seoul


INTRODUCTION

Joseph Beuys cared for this planet and all the creatures that live here. Throughout his life he studied its structure, evolution, and the behaviour of its flora and fauna including ourselves. He tried to provoke us into thinking about what it means to be a human being and he worked to create an art which would be physically, psychologically, and socially part of our lives. He did so by using subjects and substances which have never been used in art before. He also used his own presence and personal history in his art in ways which had never been seen before.

He took the long view of history and the wide view of geography and tried to be as factual and scientific as possible. He fought for the freedom for everyone to be creative, and he used every aspect of his experience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He did not have a commercial one-man show until he was over forty,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nineteen-sixties he was relentlessly in the public eye. He died at the relatively young age of sixty-four having changed the potential of art for ever. And he left the world a better place than he found it.


독일의 미술가이면서 나치 공군에서 부조종사로 복무하고 있었던 보이스는 러시아 크리메 상공에서 격추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그의 얼어붙은 몸을 구해준 그 지역 원주민 타타르인이 사용한 펠트 천과 기름 덩어리는 그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되며 생명의 순환, 자연, 외부와의 교류는 그의 작품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는 대지의 에너지와 샤마니즘적인 힘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던 그의 개념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예술과 삶의 분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의 진지한 사유와 적극적인 표현 방식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로 만들게 되었다.

1946년 말까지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47년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조각을 배우게 된다. 1950년대에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조각, 불에 탄 재료 등을 사용하여 거친 표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제작하였고 1960년대에 구리, 나무, 펠트천, 기름 덩어리, 뼈, 꿀 등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의 핵심 재료로 사용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1961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된 후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환경주의파에 가담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1963년 이후 10여 년간 활발한 퍼포먼스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1960년대 말 "사회적 조각"이라는 개념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조각의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확대 하면서 1967년 독일 학생 정당을 조직하여 "인간의 생활과 사고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근본적인 개선"을 주장하며 또한 "진정한 대립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 예술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75년 제5회 카셀 다큐멘타에서 그는 "보통선거를 위한 직접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정보 사무국"을 설치하며 사회정치적, 예술적 활동의 연장선을 보여준다. 1972년 대학 합격 정원 외의 학생들의 입학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여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지만 1978년 카셀 연방 노동 법원에서 해직 무효 판정을 받기도 한다. 197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198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7,000그루의 나무심기를 시작하였던 보이스는 1986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1986년 두이스부르크 시는 그에게 빌헬름 렘브르크 상을 수여하였고 다름슈타트 미술관에 다수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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